김지은의‘삶도’인터뷰

유학 준비하다 아버지 사업 부도로 생업 전선에어머니 화장대 즐비한 샘플 보고 ‘부자 되자’ 결심“돈은 결국 사람, 삶 바꾸지 않으면 새어나간다”

부자언니

유수진(44)씨의 다른 이름이다. 상표 등록까지 해뒀으니, 법적으로도 그의 것이 맞다. 이 부자언니라는 네 글자에서 뽑아낼 수 있는 의미는 몇 개일까.

일단 부자인 언니. 맞다. 그녀는 이미 2008년 연봉 6억원을 달성했다. 그 액수를 심지어 삼성생명 입사 3년 만에 이뤘다. 매년 연봉을 3배씩 올린, 성장의 결과였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가격을 보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고, 고가의 수입 자동차를 굴렸다. 국내에 5벌 밖에 없다는 비비안웨스트우드 드레스? 내가 입어야지. 택시 기본요금 같은 거, 당연히 몰랐다.

부자가 된 언니란 뜻도 있다. 언니도 처음부터 부자는 아니었단 얘기다. 대학원에 다니며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20대 초반, 집이 망했다. 언니는 결혼했고, 여섯 살이나 어린 남동생은 아직 학생이었다. 사기를 당한 아버지는 무기력증에 빠졌다. 어느 날 화장품 가게에서 얻어온 샘플들이 놓인 어머니 화장대를 보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났다. 결심했다. 부자가 되어야겠다고.

그런데 그녀는 부자가 된 자신의 정체성에 왜 ‘언니’를 붙일까. 자산관리사로 첫 발을 내디딜 때 주고객을 젊은 직장인 여성으로 정했다. 고객 상담을 몇 번 해보니 나이든 남성들은 ‘어린 여자가 뭘 알아’ 식의 태도가 다반사였고, 주부들은 계약서 사인 직전에도 남편이 ‘노’하면 도루묵이었다. 2030 여성들은 달랐다. 자신 같아서 세심한 상담이 가능했다. 휴대폰 번호도 그래서 아예 ‘2030’으로 바꿨다.

그녀는 보험 상담을 하는 게 아니라 평생 자산관리를 조언했다. 보험 상품은 인생의 위기가 닥쳤을 때 해결할 리스크 매니지먼트로 활용하도록 설계해주고, 펀드와 주식까지 공부해 고객이 돈을 불리도록 깨알 정보를 제공했다. 그러니 고객이 고객을 소개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럼 완벽한 부자인가. 언니도 실수를 한다. 크게 사기를 당했던 거다. 자신 때문에 손해를 본 이들의 돈까지 물어줘 3억 5,000만원을 날렸다. 얼굴이, 마음이 가뭄 때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졌다. 그때 명상을 배우면서 자신을 돌아봤다. 자만이 아니라 자존감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고객이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으로, 돈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인생을 바꾸길 바라게 된 것도 그때다. 그건 ‘언니의 마음’이었다.

부자언니는 아직 엄마는 아니다. 아이가 생기면, ‘부자엄마’로 어린이 경제 교육을 임상 적용해보겠다는 게 다음 목표다. 돈이 뭔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는지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존 기술을 가르쳐주는 곳이 어디도 없다는 게 그녀는 늘 답답했다.

거기다 언니는, 한국의 부자언니가 아니라 글로벌 언니를 꿈꾼다. 내 손길이 필요한 동생들이 어디 한국에만 있겠냐는 거다. 조만간 중국과 베트남의 2030 여성들이 ‘부자언니’를 읽고, 보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부자언니라는 단 네 글자에, 이런 풍요한 빛깔을 담기까지 쉬운 건 없었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해서 다른 삶이 됐다”는 그녀를, 6월의 첫날 마주했다.

◇월급 80만원 인턴, 3년 뒤엔 연봉 6억

-집에 돈 벌 수 있는 다른 사람은요?

“저뿐이었죠. 언니는 결혼했고, 저보다 여섯 살 어린 남동생은 롯데리아에서 화상 입어가며 감자를 튀겨봤자 얼마 못 벌었고요. 저는 석사 2년차였는데, 다행히 교수님 소개로 부산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에 인턴으로 들어갔어요. 연구원 밑에서 일하는 계약직 연구생이었죠.”

-월급이 얼마나 됐나요?

“80만원 정도. 그래서 그것 말고도 취미로 해왔던 살사 댄스 강습도 하고 부전공으로 한 영문학 실력을 살려서 영어 문제은행 출제 아르바이트도 했죠. 제 능력으로 돈 벌 수 있는 일은 다 찾아서 한 거예요. 그래도 한 달에 쥐는 돈은 다 합쳐 130만원 남짓이었죠.”

중간에 서울의 식약청(현재는 식약처로 승격, 오송으로 이전) 본청으로 옮겨와서 2004년초까지 일했다. 3년여를 다녔지만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계약직이었으니까. 중간에 외국계 건강기능식품 회사인 유니시티코리아에 들어간 것도 그래서였다. 본사의 제품 성분을 한국 식품위생법에 맞게 표기하는 레귤레이터리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그곳도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구조조정을 하면서 책임자급이 아닌 실무자들을 정리하는 걸 보면서 ‘저게 내 미래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던 거다. 그러던 차 삼성생명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완전히 다른 직종인데요.

“식약처 다닐 때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가족은 어떡하나 싶어서 제 발로 가서 종신 보험을 든 적이 있었거든요. 당시 담당 보험설계사가 저를 좋게 보고 소개를 한 거예요. 삼성생명에서 은행의 PB(Private Banker) 같은 조직을 신설한다면서요. 기존의 주부 중심 FC(보험설계사) 조직도, 대졸 남성 설계사들의 LT(Life Tech) 사업부도 아닌 대졸 여성들을 고용해 WLT(Wealth Life Tech)라는 일종의 특수부대를 전략적으로 만들어 키우려 한다는 거예요. 게다가 이전 회사의 연봉은 최소한으로 보장해주는 조건이었죠. 그런데 결국 보험 팔라는 얘기 아닌가 싶어서 6개월을 고민하다가 지점장 면접을 보면서 이직을 결심했죠.”

◇‘앞으로 5년 뒤엔?’ 질문에 말문이 막히다

-어땠기에 그랬어요?

“면접이라기보다 강의였는데요. 저한테 물으시더라고요.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 건지. 말문이 턱 막혔죠. 그때까지 저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당장 코 앞에 빚 갚는 거 외에는 목표가 없었거든요. 내 미래는 없이 그저 어두운 터널을 걷는 느낌이었죠. 5년 뒤, 10년 뒤엔 어떻게 살지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구나 처음 깨달았어요. 그런 인생 설계와 함께 자산관리 계획을 짜주는 직업이라면 괜찮을 거 같아서 결정했죠.”

-들어가자마자 3W(일주일에 보험 계약을 3건 이상 체결)를 연속으로 한 걸로 유명한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그걸 달성하려면 일단 내가 전화할 리스트를 만들어야 해요. 적어도 30명. 전화를 돌려서 약속을 잡죠. 미팅을 최소 두 번은 해야 계약이 돼요. 첫 미팅은 고객의 재정 상황을 파악하는 자리, 두 번째는 솔루션을 갖고 가는 미팅이죠. 그런데 첫 미팅만 하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럼 리스트 30명에서 적어도 15명한테서 두 번째 미팅을 잡아내야 그 중에서 계약이 3건 나올까 말까 해요. 그걸 매주 하려면 출근하자마자 오전 10시반부터 시작해서 저녁까지 하루에 4, 5명씩을 만나야 하죠. 그때는 연휴가 있으면 막 화가 났어요.”

-왜요?

“아니, 나는 3W를 해야 하는데 왜 연휴가 있어서 쉬어야 하는 거야. 휴일이면 하루만 쉬지 왜 3일이나 쉬나 싶었던 거죠. 그럼 고객을 그만큼 못 만나니까요.”

-전화를 돌릴 리스트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처음엔 지인들로 적죠. 그런데 제가 학교를 서울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고향도 서울이 아니니까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러니 그 다음엔 결국 지인에게 소개를 받아야 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소개를 해줄까 생각해본 거죠. 지인이지만 제가 이 사람한테 만족스런 파이낸셜 플래닝을 해줘야 고마워서라도 소개를 해줄 거 아니에요? 제가 식약청 다닐 때 아쉬웠던 게 월급통장 만든 은행에 가서 재테크 상담을 하면 팜플렛이나 몇 장 주면서 이 중에 골라서 적금 들라는 게 다라는 점이었거든요. 근데 뭐가 뭔지 알아야 들죠. 포털 사이트에서 재테크를 검색해봐도 방법을 찾을 수가 없고요. 그래서 내가 궁금했던 것에 답을 주는 상담을 해주자고 생각했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요?

“월급에서 생활비를 뺀 돈으로 단기, 중기, 장기 재테크 플랜을 짜줬어요. 예를 들면, 단기용은 상호저축은행 이자율 5.5%짜리 적금 상품으로, 여윳돈은 MMF(머니마켓펀드), CMA(종합자산관리계좌)에 넣게 하고, 종자돈이나 노후 준비는 보험회사 장기 변액 상품으로 짜고요. 펀드가 유행하기 시작한 2005년 후반에는 펀드 정보도 고객들에게 알려줬죠. 그렇게 몇 년 뒤, 몇 년 뒤 자산 로드맵을 고객이 한눈에 알 수 있게 정리해줬어요. 다들 이런 상담은 처음 받아봤다고 했죠. 그러니까 한 사람이 고객이 되면 그가 5명을 소개해주는 거예요. 그렇게 전화를 할 리스트가 늘어난 거죠.”

-어려움도 있었을 텐데요.

“아직도 기억나요. 가산디지털단지 쪽 통신회사에 다니던 분이었는데 점심 시간에 제가 찾아가서 만나기로 했어요. 김밥을 사서 회사 회의실에서 상담을 하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그 고객이 갑자기 약속이 생겼다면서 점심 시간 지나서 만나자는 거예요. 회사 밖 벤치는 4월쯤이라 춥고 황사까지 있어서 안 되겠고, 건물 안엔 마땅히 먹을 곳이 없더라고요. 화장실에 들어가서 변기 뚜껑을 닫아놓고 앉아서 김밥을 먹는데 너무 화가 나더군요. 나를 얼마나 우습게 생각했으면 이럴까 싶어서. 고객에게 전화를 했어요. 상담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으니 그냥 돌아가겠다고요. 그 다음부터는 고객을 찾아가지 않고 회사로 오시라고 했어요.”

-어떻게요?

“우리회사 미팅룸을 활용했죠. 재테크 상담이니 한번 하면 두 시간 정도는 걸리는데다 자산 현황을 파악해야 하니 커피숍 같은 시끄러운 곳에서 하기에도 적절치 않거든요. 그러니 저희 회사로 오시는 게 어떠냐고 한 거죠. 그러니까 오히려 고객들이 부담을 덜 느끼시더라고요. 사실 누가 찾아오면 뭐라도 하나 해줘야 할 것 같잖아요. 또 제가 어디에서 일하는지 확인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요. 나중에는 회사 미팅룸이 거의 제 전용 상담실이 될 정도였죠.”

-그렇게 해서 연봉이 어떻게 늘어났나요?

“보험 계약을 체결하면 수수료가 배당되거든요. 그 수수료로 받은 연봉이 입사 첫 해 1억원이 넘었죠. 둘째 해엔 2억7,000만원, 셋째 해엔 4억3,000만원, 넷째 해엔 6억원이 됐어요. 그리곤 사내 이사로 승진했죠. 3W를 연속 4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업계에서 저더러 ‘뭐 저런 괴물이 있나’한 거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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